우리집 이야기

벌초

여인두 2025. 9. 22. 10:21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묘역은 금세 잡풀로 가득 찬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어디에서든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으려는 생명의 끈질김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이 세운 규범과 예법에 어긋나더라도 풀과 나무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제 몫을 다할 뿐이다.

벌초는 그 자연의 흐름을 멈추려는 인간의 의식이다. 자손된 도리라 이름 붙이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 강제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자연을 어찌 이길 수 있으랴. 멈추었다 싶어도 다시 자라고 깎아냈다 해도 이내 되살아난다.

이제는 내 손에 힘도 점점 떨어지고 후대 누구도 이 일을 이어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마지막일지도...

이미 장묘문화도 바뀌어 머지않아 벌초라는 풍습도 사진 속 한 장면처럼 문화유산의 이름으로만 남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인간들의 자연에 대한 도전도 한순간의 의식으로만 기록될 뿐, 끝내 자연의 순환 앞에 굴복할 것이다. 그리고 남는 것은 잘 정돈된 자연이 아니라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변화무쌍한 자연의 생명력이다.

그렇게 인간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자연이 제 길을 찾을 때 망자들 또한 비로소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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