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반대

여인두 2010. 2. 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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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저지 투쟁소식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저지를 위한 투쟁 소식을 보내드립니다.

 

 

한진중공업 해고자이고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인 김진숙 동지가 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 앞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간 지 오늘로 20일째입니다.

한진중공업 노조 역사가 말해주듯이 그동안 여러 번의 싸움에서 세 명의 동지를 잃은 아픔이 있기에 밖에서 투쟁을 바라보는 동지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김진숙 동지 건강이 악화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진중공업 지회 차원에서 2월 1일부터 11일까지 조합원 100명이 돌아가면서 상경투쟁을 벌이고,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차원에서도 2월 1일부터 산별, 연맹별로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에서 매일아침 출근시간 선전전과 천막농성을 벌이기로 하여 이제 투쟁이 지역 차원으로 확산될 것으로 보입니다. 오는 2월 9일에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분쇄를 위한 지역집회도 계획하고 있으며,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부산시민 서명운동도 전개하고 있습니다.

투쟁의 승리를 위해 동지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연대를 부탁드립니다. 참고로 김진숙 지도위원의 글과 조합원 글을 퍼서 보냅니다. 단지 한진중공업투쟁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모습도 함께 되돌아 보았으면 합니다.

 

 

콩국 한 그릇

 

2010. 1.18. 김진숙

 

 

차가 있었다면 당장 차부터 팔았을 겁니다.

땅바닥에 누워보면 세상에 경차는 없습니다.

겉보기 아무리 작은 차라도 반드시 제 무게 이상으로 지구를 울리며 지나갑니다.

오토바이는 이명박보다 더 싫습니다.

적의 동태를 수시로 감시하는 레이다처럼 텐트 안을 1초 간격으로 훑고 지나가는 헤드라이트 불빛들.

 

한강 철로 위에서 잠을 자본 적은 없지만 그 위로 기차가 지나가면 이럴 거 같습니다.

저 육중하고 폭력적인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탱크 같은 저것들이 어느 순간 내 몸을 짓이기고 골을 빠개고 바퀴에 뇌수를 너덜너덜 매달고 지나갈 거 같은 환상.

아사가 아니라 그걸로 죽지 싶습니다. 로드킬.

나 좋자고 끝도 없이 쏟아내는 문명이란 건 바닥 밖엔 갈 데가 없는 목숨들에겐 살상의 폭력임을 깨우치는 시간들.

 

86년엔가 그 이듬해인가도 단식을 했었습니다.

그땐 천막도 몰랐습니다.

짓밟힌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아 다시 일어섰던 시절.

전술도 없고 전략도 없고 교섭도 없던 시절.

성명서도 없고 대책위도 없고 상급단체도 없고 지침도 없던 시절.

오로지 들끓는 분노만 시퍼런 죽창 같던 시절.

해고자 세 사람이 밟힌 그 자리에 그대로 맨바닥에 주저앉았던 행위가 먼저 생기고

단식농성이라는 개념은 그 후에도 몇 년 만에 등장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유일하게 피웠던 요령은 라면박스를 깔고 앉는 일이었습니다. 맞은 편 가게 아주머니가 갖다 주셨던.

 

몇 시간인가 회의를 해서 깔고 앉기로 결론 난.

그렇게 며칠을 앉아있으니 한 사람씩 라면박스를 들고 와서 같이 앉아 같이 굶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 중에 박창수도 있었고.

지금 제가 있는 텐트 안에는 솔직히 없는 게 없습니다.

전등에 전기스토브에 전기주전자에 전기담요에 mp3에 휴대폰충전기에.

회사에서 전기를 끊었습니다.

순식간에 작동을 멈추는 버릴 데도 없는 쓰레기들.

20년 민주노조운동은 그런 게 아니었나 싶어요. 그런 쓰레기들을 늘려오는.

그런 것들을 늘리기 위해 비정규직도 버리고 장애인도 버리고 노점상도 버리고 농민도 버리고 여성도 버리고 다 버리고 그런 것들만 애먼글먼 끌어안고 아이들에게 그런 것들을 더 많이 물려주기 위해 잔업하는.

 

요즘은 그런 생각이 다 들어요.

그 삼양라면박스가 관료주의의 싹은 아니었을까.

그때 그냥 맨바닥에서 버텼어야 했던 건 아닌가.

그랬다면 천막도 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장판도 깔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진짜 싸울 사람들만 남지 않았을까. 껍데기들은 가고. 아니 아예 오지도 않고.

교육은 있어도 학습은 없는 운동.

회의는 있어도 토론은 없는 운동.

 

전지전능한 몇 사람이 ‘방침’을 내오고 조합원들에겐 ‘지침’이 내려올 뿐입니다.

미래가 생산되는 공정자체가 봉쇄돼있습니다.

사람을 키우지 않으니 할 사람이 없고, 할 사람이 없으니 하던 사람이 또 합니다.

그렇게 우린 후배들의 길을 가로막고 스스로 미래를 포기했습니다.

3년 전부터 역사가 거꾸로 갔느니 시간이 되돌아갔느니 말들이 많았습니다.

서는 자리마다 전선이고 발 닿는 곳마다 전쟁터이고 쓰는 글마다 추모사인 일상이 단절 없이 이어지고 있을 따름이라 사실은 별 실감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십 몇 년 피 터져가며 살았던 게 아주 헛산 건 아니었다는 희미한 흔적은 남았습니다.

민주화운동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신청 10년 만에 느닷없이 내려준 명예회복과 부당해고 결정. 해고된 지 24년, 출감한 지 21년만입니다.

그게 작년 11월 이었습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용량이상의 기쁨이 닥치면 실감이 별로 안 나는 모양입니다.

 

출근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아닙니다. 쌍용차투쟁을 ‘보고’나선 투쟁이란 말 함부로 쓰면 안되겠습니다.

출근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시작했던 곳에서. 혼자. 맨몸으로. 다시. 시작하자.

다른 건 진심이었지만 ‘혼자’는 영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진심이 아닌 바램이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모양입니다.

첫날, 정문 앞에서 조합원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해고예고를 받아놓은 하청활동가가 유인물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민주노동당에서 열 명 정도가 함께 나와 같이 뿌리고 있었습니다.

홀홀단신인 제 눈에는 그 열 명이 무적의 강철대오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다 뿌리고 가는데 제 유인물은 거의 그대로 남았습니다.

하필이면 비가 내렸습니다. 비에 젖은 유인물은 참 무거웠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박성호 동지가 옆에 서주었습니다.

 

박창수 위원장, 김주익 지회장, 곽재규 동지를 제 손으로 묻으며 쌓은장례 내공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라 이 친구 없이는 열사들 장례 못 치릅니다.

장례전문가를 배출해 낸 한진노조의 역사.

 

“그러다 짤리면 어짤라구. 낼부터 나오지 마” 입안에서 뱅뱅 도는 그 말을 아직도 못했습니다.

3일 정도 지나자 경비들이 노조출입을 막았습니다.

“조합원이 노조에 가는데 왜 막노” 라는 제 항의에 그들은 신기하게도 24년 전과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우린 위에서 시키는대로 하는거요”

세월은 영락없는 그 세월인데 저만 중늙은이가 되어 그 세월 앞에 홀로 마주섰습니다.

과거가 지속되는 걸 인정할 수도 없고 미래를 준비하지도 못한 저는 과거로부터도 미래로부터도 고립됐습니다.

 

07시. 신관 앞에 피켓을 들고 서면 아직 어둡습니다.

24년 전이나 지금이나 통근버스는 그 시간이면 들어옵니다.

24년 간 공장을 지켜오면서 위원장의 장례를 두 번이나 치르고 동료의 장례마저 치러야했던 기가 막힌 아저씨들이 그 통근버스에서 내립니다.

정리해고 방침이 발표되면서 아저씨들의 불안한 눈빛이 제 눈엔 보입니다.

열에 여덟은 하청노동자들입니다.

정규직이었다가 하청이 된 아저씨들도 많습니다.

이미 하청노동자들은 천명 가까이 짤려 식당이 헐빈하고 통근버스가 텅텅 비었다는 소문이 괴담처럼 떠돕니다.

 

마산에서 오는 통근버스에는 네 명이 내립니다.

출근시위를 처음 시작했던 50여일 전과 비교해도 확연히 눈에 띌 만큼 숫자가 줄었습니다.

그 아저씨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쌍용차 동지들, 하이닉스 동지들, 콜텍 동지들, 기륭동지들, KTX 동지들, 이랜드 동지들.

그 외에 이름을 들먹이는데만도 A4용지 세 바닥이 훌쩍 넘어 갈, 정리해고 투쟁을 하면서 제가 만났던 수많은 동지들.

 

죄송합니다.

다 아는 것처럼, 다 겪은 것처럼 세치 혓바닥을 놀렸지만 사실은 남의 일이었습니다.

그것 또한 저한텐 일상이었으니까.

“차라리 죽여라” “해고는 살인이다”

이런 구호 솔직히 너무 적나라하다 생각했습니다.

 

지금 제 텐트 입구엔 “해고는 연쇄살인이다” 가 붙어있습니다.

누군가 피 묻은 손으로 심장을 꺼내 징 박힌 신발로 자근자근 밟으면 이렇게 아플까요.

어디로 사라지는 지 알 수도 없고 어느 날 부턴가는 훌쩍 사라져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아저씨들. 그걸 아침마다 확인하는 일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다시 현장에 돌아가 아저씨들은 족구하고 저는 심판보고, 햇볕 따신 날은 선각공장 앞에 안전화 벗고 언 발을 나란히 내놓고 녹이는 꿈을 단 한시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어쩌다 한번 목구멍에 쇳가루 먼지 벗겨내는 날. 강씨아저씨의 그 구성진 노랫가락을 다시 들어보는 일을 단 하루도 잊은 날이 없었습니다.

“숙에이~” 부르시던 허씨아저씨의 목소리를 꿈에서도 듣곤 했습니다.

제가 철판에 두 다리가 깔려 병원에 오래도록 입원해 있을 때 번갈아 죽을 끓여 주전자에 담아오시던 아저씨들. 미안해 어쩔 줄 모르던 제게 “낸쥬 씨븐 쏘주나 한잔 받아주라이” 하시던 그 약속이 술 광고만 봐도 생각이 났습니다.

눈알에 박힌 용접불똥을 종이를 뾰족하게 접어 빼내는 방법을 일러주시던 아저씨들.

좁은 땡크 안에 들어갈 땐 발을 밀어 넣고 동시에 어깨를 같이 넣어야 쏙 빠진다는 걸 알려주시던 김씨아저씨.

 

사다리가 없는 블록에 오를 땐 두 팔로 철판을 짚고 동시에 몸을 띄워야 한다는 걸 시범과 함께 보여주시던 박씨아저씨.

그때 제겐 무엇보다 절실했던 생존의 정보들이었습니다.

버스안내양 시절 달리는 버스에서 뛰어내릴 땐 오른발이 먼저 땅에 닿아야 바퀴 밑에 안 깔린다는 정보만큼이나.

2003년도에 강씨아저씨 허씨아저씨가 짤렸습니다.

김씨아저씨 박씨아저씨 마저 짜르겠다는 이때.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동원’할 조직도 없고 ‘지침’을 내릴 권력도 없는 제가 뭘 할 수 있었을까요.

조합원들을 지키겠다고 싸우다 같은 날 두 명의 장례를 함께 치른 게 6년 전인데, 더 크고 더 시퍼런 칼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저들 앞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을까요.

명단 발표되면 끝인데, 그러고 나면 우리끼리 싸우고, 죽고, 열사정신 계승하자고 결의를‘내오고’, 장례 치르고, 울고불고, 추모사 쓰고..

 

쌍차에서 6명이 죽은 게 언제라고.

요즘은 뉴스도 안 보고 인터넷도 못하니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 과정이 어떻게 되는진 잘 모르겠습니다. 입을 댈 기력도 없구요.

저는 국민파도 아니고 벽제파도 아니고 중앙파도 아니고 현장파도 아니니 잘 아는 후보도 없습니다.

다만, 대장할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현장은 무너지는 걸까요.

똑똑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우린 번번이 패배하는 걸까요.

민주노총이 왜 외면당하고 욕먹는지 우리만 모릅니다.

추한 소문일수록 당사자만 모르듯이.

 

욕하면 국민파의 음모라 하고 현장파의 작태라 하면 됩니다.

다 같이 욕먹을 땐 조중동의 악랄한 왜곡선전 때문이라고 하면 됩니다.

끼리끼리 모이면 욕이 배따고 들어오나 이런 말도 논리가 됩니다.

욕이 배따고 들어와야 치유가 된다는 걸 우리끼리만 모릅니다.

위원장선거에다 지자체선거까지 앞두고 있으니 후보들이 앞 다투어 ‘방문’하시겠지요. 이슈도 있고 표도 되는 사업장이니까.

 

다만, ‘발언’ 하려고 오진 마십사 하는 부탁을 드립니다. 간곡히.

발언 기회 확보되면 이 투쟁에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핏대 세우곤 또 다른 사업장으로 가시겠지요. 시간이 없으니까. 가셔서 똑같은 ‘발언’을 하실테구요. 저도 그랬거든요.

어떤 위원장은 하루에만 목숨 세 번 거는 것도 봤습니다. 가는 데마다.

민주노총을 정말로 바로 세우고 싶다면 그리고 진심으로 비정규직의 현실이 아프다면 결의를 했던 그 자리에 눌러앉으세요.

그 자리에서 비정규직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조건에서 일하고 짤리는지 눈으로 직접 보십시오. 자료는 그만 보시고.

 

정규직은 그나마 싸울 조직이라도 있고 연대할 상급단체라도 있습니다.

뉴스에라도 나오고 신문에 한 줄이라도 나옵니다.

비정규직들은 어쩌면 좋을까요.

한진에서만 천명 가까이가 짤렸고, 소문으로 떠도는 앞으로 짤릴 4천명의 목숨들을 도대체 어째야 할까요.

그 답을 가져오시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최소한 후보님들을 추대했던 조직들과 함께 실천할 방안들을 다만 한 가지라도 마련해오십시오.

한 시간에도 수 만대의 차가 골을 흔들고 생애를 흔들며 지나다니는 길가에 쳐놓은, 잠시도 쉬지 않고 펄럭이는 작은 텐트에 누워서야 비로소 51년의 삶과 그 절반을 차지하는 운동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난 어떻게 살고 싶었던 것일까.

어떤 삶을 꿈꾸다 여기까지 와서 혼자 누워있는가.

어떤 삶을 살았기에 여기 혼자 누워 굶고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길바닥에 나앉아 굶는 이것밖엔 할 게 없겠다고 마음을 굳히며 그래도 거창한 꿈을 품었습니다.

 

민주노총이 당장 천막을 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단위노조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한진중공업 앞에서 태종대까지 천막이 늘어설 것이고 그럼 이길 것이다..

사람이 안 죽고도 이길 것이다..

김주익도 그런 마음으로 홀로 크레인위에 올랐겠지요.

엿새를 이러고 있어보니 김주익은.. 우리가 죽였습디다. 내가..

그럼에도 저는 따뜻한 콩국 한 그릇이 너무 먹고 싶습니다.

 

 

한진중공업 김진숙동지 단식농성장에서....

 

두부밥(2010.2.1.민주노총부산지역본부 조합원게시판에서 퍼옴)

 

 

한진중공업 신관 앞, 금속부산양산지부 천막 옆 모퉁이에 조그마한 텐트 하나가 쳐 저 있습니다. 텐트 안에는 50이 넘은 한 여성동지가 ‘무차별 짤려 나가는 사내하청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사수하고, 정규직 노동자들의 정리해고를 막고자’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19일째 하고 있습니다.

 

1981년에 21살에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용접공으로 입사해 조선소 노동자의 삶을 살아온 동지, 용접 맨을 눌려 쓰고 일에 열중해 있으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 못할 정도로 일 밖에 몰랐던 동지, 억센 조선소 남성 노동자들 사이에 홍일점 이었던 동지는 평범한 조선소 여성노동자였습니다.

짓궂은 아저씨들은 진숙이는 여자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들만이 나누는 언행들을 무작정 주고 받습니다. 요즘 같으면 바로 성희롱으로 구속감인데 말입니다.

 

이런 짓궂은 아저씨들은 어느 날 갑자기 “진숙이가 대의원 한번 출마 해 봐라. 우리가 팍팍 밀어줄게” 순진하게도 늙은 아저씨들 말만 믿고 대의원에 출마했는데 당선이 된 것입니다.

 

그 후로 23년 동안 한진중공업 민주노조 역사를 등에 업고 살아온 동지가 바로 김진숙 동지입니다.

의리도 자존심도 없는 사내들처럼 어용위원장 밑에서 줄만 서 있어서도 지금쯤은 좋은 데 시집가서 화목하게 평범한 주부가 되어 있을 것인데 말입니다.

 

동지는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조합원들의 피와 땀인 조합비를 눈먼돈이냥 마음대로 사용하는 사내놈들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노동조합 간부자리를 벼슬로 생각하는 사내놈들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회사와 짝짝쿵이 되어 바른말 하는 조합원들의 말을 막는 사내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노동조합 사무실을 그들의 놀이터로 생각하는 사내들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조합비를 갈취하고자 멀쩡하게 살아있는 아버지, 어머니를 두 번이 나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아들, 딸도 죽었다고 상조관계 서류를 조작했던 사내놈들을 그냥 볼 수가 없었습니다.

 

위원장 한번하고 나면 전셋집에서 연립주택 주인이 되어 있는 모습을 그냥 볼 수 없었습니다.

노동조합 정기총회를 영도에서 가장 잘 나 가는 목장원 소고기 집에서 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영도경찰서장, 영도구청장, 영도유지들과 함께 술자리 회의를 하는 어용위원장의 반 노동자적 행동을 그냥 볼 수 없었습니다.

 

노무과 대신 조합원을 관리를 해 주고 있는 사내들을 그냥 볼 수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그냥 못 본 척 했으면 이 곳에서 텐트를 치고 단식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김진숙 동지는 그들의 행위들을 그냥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폭로했습니다. 어용노조 사내들의 비리를 폭로했습니다.

그래서 무진장 두들겨 맞았습니다. 노동조합이 회사와 한통속이 되어 연약한 여성 노동자를 두들겨 팼습니다.

 

이번에는 안기부, 보안대, 시경정보과도 한패가 되어 동지를 빨갱이로 몰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김진숙 동지를 빨갱이로 알았습니다.

군대 갔다 복직하는 날 안전과 강의실에서 “김진숙이는 빨갱이다”라는 교육도 받았습니다.

“사내놈들이 거시기 차고 저 빨갱이 여자에게 물들면 등신이라”고 하는 강사의 말씀을 듣고 나면 김진숙은 완전히 빨갱이가 되어 있습니다. 소위 고정간첩이 되어 있었습니다.

 

19일전 단식에 들어가기 전만 하더라도 김진숙 동지는 노동하는 곳이며 어디든지 달려가 교육하는 이름난 노동운동의 강사로 알려져 있었지요. 23년 시절에 한진중공업의 늙은 노동자들과 짓궂은 사내들이 나누었던 언행, 어용노조 간부들의 행동들은 김진숙 동지를 통해 투쟁현장에서, 집회현장에서, 노동교육현장에서, 노조간부수련회장에서 80년대 조선소 노동자들의 현실을 생생하게 그러내는 필수 교육자료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런 김진숙 동지의 목소리도 작은 텐트 속에 묻혀 있습니다.

전국의 노동자들을 만나고 싶어도 갈 수가 없습니다.

단식 13일째까지만 하더라도 출근하는 사내하청 노동자들과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출근 인사를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일어나 걸을 수 조차도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나빠져 있습니다. 물도 먹기 힘들 정도입니다.

 

얼굴을 보면 눈물이 나와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만 할 뿐입니다.

함께 동조 단식이라도 하고 싶지만 한진중공업 지회가 “정리해고 철회”라는 큰 투쟁을 하고 있기에 지회 방침과 다르게 행동하면 오히려 조합원들의 단결력을 훼손시킬 수 있다는 의견들이 지배적이라 어찌 바를 정말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조합원으로써 지회 방침과 다르게 행동하면 그 여파가 김진숙 동지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한진중공업 지회에서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며, 오히려 김진숙 동지의 단식농성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회는 통 큰 가슴으로 혼자 외롭게 싸우고 있는 김진숙 동지의 단식결행에 대한 진정성을 깊이 헤아려 주시길 지면으로나마 간절히 부탁해 봅니다.

 

김진숙 동지의 단식 11일이 되는 날 큰딸 예슬이, 작은 아들 슬옹이 그리고 각시를 데리고 농성장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각시는 저보다 김진숙 동지를 더 많이 사랑합니다. 항상 진정성을 가지고 김지도위원을 사수하라곤 합니다.

 

아이들은 아직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어릴 때는 아빠 엄마가 가자고 하면 어떤 집회든지 마다하지 않고 다니던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고나서는 절 때 따라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나마 작년 김해박물관에서 개최되었던 촛불집회는 온 가족이 하루도 빠짐없이 참석해 가족발언도 하곤 했지만 말입니다.

이런 아이들을 각시가 어떻게 설득했는지 김지도위원 단식농성장에는 순순히 따라 나서 섰습니다. “오늘 농성장 방문은 체험학습이다”라고 가르침을 했습니다.

김지도위원이 올린 글속에 “한밤중에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 티코 지나가는 소리를 체험해 가마 하루 밤을 지세우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른과 다릅니다. 오토바이, 자동차 지축을 뒤 흔들며 달리는 소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코가 삐뚤어지게 잠만 잘 잡니다.

 

아침은 단식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부산을 뜰 수가 없어 컵라면으로 정리했습니다.

오랜만에 아들과 회사 생활관 목욕탕에서 목욕을 했습니다.

일요일이라 생활관은 목욕탕은 우리들의 전용 목욕탕이 되었습니다.

아빠가 아들하고 목욕 가는 일이 가뭄에 콩나듯 하여 아들은 집에서 대충 샤워정도만 했던 모양입니다. 떼가 무진장 많이 나왔습니다.

목욕이 끝나자 아들은 실평수 15평의 한진중공업 사원 아파트의 10배가 넘는 넓은 생활관을 독차지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아빠가 불려도 아빠에 대한 관심은 뒷주머니에 넣어 둔 모양입니다. 아들은 완전히 쌩 깝니다.

 

오후에는 단병호 민주노총 전 위원장님과 박문진 전 민주노총 부위원장님이 텐트를 방문했습니다. 제가 볼 때 김진숙 지도위원과 박문진 동지는 닮은 점이 많았습니다. 꼭 집어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단병호 위원장과 박문진 동지는 우선 단식을 하고 있는 김진숙 동지를 잠시 만나고 지회장을 만나기 위해 지회 사무실로 올라갔습니다. 30여분이 지나자 다시 천막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산전수전 다 겪었던 단병호 위원장이 단식에 대한 주의사항을 알려주면서 어떻겠든 조합원들을 조직해 조합원들의 힘으로 투쟁을 돌파할 수 있도록 하고, 이런 힘을 바탕으로 김진숙 동지의 단식도 풀게 하는 것이 올바른 방식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김진숙 동지 단식을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갔습니다.

 

그런 당부의 말씀을 제가 다 받아 않을 수 있을지........

김진숙 동지의 단식 농성장 텐트를 최대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을 하다 보니 체력이 떨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밤에는 불이 커져 있는지만 확인하고 발길을 돌립니다.

밤 11시면 수면을 취하는 것이 단식하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됩니다.

방문하는 동지들도 참고 했으면 합니다.

 

그러나 김진숙 동지는 조합원들 방문은 시간개념을 두지 않습니다.

무조건 좋아합니다.

조합원들과 대화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말도 정말 많이 하고, 잘 합니다.

조합원 앞에서는 자동입니다.

단식 14일이 되는 날 아침에는 김진숙 동지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매일 출근하는 하청노동자와 원청노동자들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출근하는 동지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선동도 오늘따라 잘되지 않았습니다.

“하청노동자들의 생존권과 원청노동자들의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 김진숙 동지는 단식 14일째입니다. 원, 하청 노동자가 하나 되어 정리해고를 막아 냅시다”라는 선동의 내용이 영 힘이 없었습니다. 자꾸만 울분이 복 바쳐, 선동내용도 까먹었습니다.

김진숙 동지가 일어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금속부양본부, 한진지회 총 비상이 걸렸습니다.

 

산별대표자를 소집하고, 금속지부차원에서는 한진중공업 전직 위원장들도 소집했습니다. 시민대책위에 소속된 지도급들에게 전화를 해 대책 마련을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도 화가 났습니다.

운동이 정말 수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체성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사전에 더 노력할 수 있었을 것인데...

문제가 생기면 움직이는 이런 모습 정말 이런 것은 아닌데...

현장 몇몇 동지들에게 문자를 보내 지금의 상황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다소 긴박하다고 돌출 행동은 하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최대한 지회가 중심에 서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다들 노력하자는 내용의 문자였습니다.

의사가 와서 건강 체크를 했습니다. 상태가 너무 안 좋다는 말입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절대 병원에 갈 사람이 아니기에 포도당을 맞을 사람도 아니기에...

오직 단식을 중단시킬 수 있는 길은 전체 조합원들이 단결된 힘으로 한진자본의 정리해고 방침을 철회시키는 것이고...

조합원들의 투쟁을 만들어내기 위한 지도부들의 실천적 투쟁 없이는 어떠한 말도 김진숙 동지의 단식을 중단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더욱이 마음만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진중공업지회가 대의적 차원에서 김진숙 동지의 투쟁을 전체 조합원과 함께 하겠다는 결의만 있어도 될 것 같은데....

이런 것 조차도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도 초라했습니다.

한진중공업 늙은 노동자들은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투쟁 꼭 승리할 것입니다. 이글을 보는 동지들 단식농성장 방문도 필요하지만 시민대책위 차원에서 준비하고 있는 한진중공업 회사 앞 출근 선전전에 몸을 실어주십시오,

매일 아침 7시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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