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잠시 멈춘 이른 아침 텃밭으로 나섰다. 비에 젖은 밭은 흙냄새와 풀향기로 가득했고 들녘엔 안개가 채 걷히지 않았다. 그 너머로 제두루미 한 마리가 느릿하게 날아가다 허둥대는 내 손길을 힐끔 보더니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하품을 하며 유유히 사라진다.
애호박은 큼직하게 제 모습을 드러냈고, 가지도 제 몫을 다했다. 하지만 오이와 고추는 영 시원찮다. 특히 기대를 걸었던 청량고추가 영 초라하다. 잎도 힘이 없고 열매도 도무지 기운이 없다. 같은 땅, 같은 물, 같은 하늘 아래서도 누구는 잘 자라고 누구는 시들어간다. 자연은 공평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불공평하다. 결국은 땅과의 궁합, 기운이 맞아야 살아남는 법이다.
최근 모 선배의 행보를 보면서 그의 끝은 어디일까를 생각한다. 자신이 살아왔던 땅을 박차고 나가 새로운 땅에서 자리를 잘 잡을까?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중요한건 그곳에서 자신을 녹여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매번 과거의 자신과 비교되면서 싸워야할텐데 그 싸움에서 이기기위해 더 악착같이 버텨야 할텐데...
그러다 다시 고추를 들여다보다 문득 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애초에 청량고추라고 믿었던 그 녀석, 알고 보니 꽈리고추였다. 이름부터 모양까지 착각한 건 내 탓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매운 기운은커녕 자기 열매 하나에도 버거워 보인다. 땅과의 궁합이 안 맞은 게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기대한 그 종류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어떤 자리에 있든, 어떤 깃발을 들고 있든, 그 사람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 끝내 알게 되는 건 결국 시간이 지난 뒤다. 내가 알고 믿었던 선배는 청량한 매운맛을 낼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저 연하고 순한 꽈리고추였을지도... 괜히 기대한 쪽의 책임이 더 커지는 순간이다.
수확이 풍성하지 않아도 땀 흘린 만큼의 무언가가 손에 잡히는 아침, 잘 자란 작물도 그러지 못한 작물도 그리고 오해했던 작물까지도 오늘의 이야기를 완성해준다.
그리고 그 제두루미, 아마 내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비웃음이 아니라 그저 다 그런 거라며 건네는 헛헛한 응원의 미소, 오늘따라 괜히 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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