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인 사오리의 말처럼 어쩌면 우리는 마음속에 그 흰 선을 그어놓고 필사적으로 선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몸부림을 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괴물은 누구일까?
황순원의 ‘소나기’ 같은 동화가 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넘지 말아야 할 그 흰 선 때문에 누군가는 괴물이 되어야 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스크린 안 그 누구도 괴물이 아니었다. 스크린 밖에서 괴물을 찾기 위한 수많은 눈들이 괴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오리의 눈에는 선생님인 호리가 괴물이고, 호리의 눈에는 사오리의 아들인 미나토가 괴물이고, 또 아이들의 눈에는 반 친구인 요리가 괴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었다. 엄마로서의 사오리, 선생으로서의 호리, 친구인 미나토와 요리 누구 하나 비정상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를 희생시켜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시스템, 그 시스템을 만든 제도, 그 제도로 운영되는 사회가 괴물이었다.
그래서 영화의 이 대사가 처음에는 당연한 것처럼 들렸다.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라 부르지 않아. 누구나 가질 수 있으니까 행복이라 부르는 거야”
그러나 그 화자가 교장선생이라는 점에서 이 말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행복’을 이유로 권력으로부터 쫓겨나는 이들도 있으니까.
호리처럼 학교 구성원들의 행복을 위해 쫓겨나고, 요리처럼 그 또래가 인정하지 않는 정체성 때문에 병자 취급받으면서 왕따를 당하는 것처럼 전체의 행복을 위해 각자의 행복은 포기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렸으니까.
그래서였을까 어쩌면 가장 포용적으로 들렸던 이 말이 실은 가장 편협한 시각을 들어내는 말이었고, 이 영화가 말하는 편견의 굴레를 대변하는 말처럼 들렸다.
결국 미나토와 요리의 선택은 슬프게도 둘만의 행복을 찾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와 눈부신 숲길을 뛰어가는 미나토와 요리 그리고 그들의 대화에 먹먹함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