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길을 한참 걷다 보면 다산초당이 나온다. 오르는 길이 좀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예전에는 나무뿌리가 그대로 드러나 세상의 근본을 생각하게 했던 '뿌리의 길'이 돌과 시멘트로 덮여버렸다. 아마도 탐방객들의 안전 때문이었을 텐데 운치는 그만큼 사라져 버렸다.
다산초당에 오르니 안경을 쓴 온화한 미소의 선비가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유배생활 17년 중 10년을 이곳에서 보냈을 선비는 비분강개의 눈빛이 아닌 세상을 통달한 형형한 눈빛이다.
유학의 근본주의자들이 지배하는 노론의 세상에서 남인의 학통을 계승해 채재공과 함께 실사구시의 세상을 꿈꿨던 실패한 혁명가로서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을까? 더군다나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으니 말이다.
[집안이 갑자기 무너져버려
죽은 자식 산 자식 이 꼴이 되었어요.
남은 목숨 이어가 봐도
크게 이루기는 이미 틀렸답니다.]
(1801년, '하담의 이별' 중에서)
다산이 유배길에 오르면서 부모님께 썼다는 이 시에서 입신양명의 길이 막혀버린 유학자의 고뇌가 엿보인다.
그러나 다산은 긴 유배생활 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기보다는 다 같이 잘 사는 대동세상을 꿈꾸었다. 그의 진심은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의 저서로 남아 지금껏 많은 사람들의 길라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다산초당을 지나 백련사 쪽으로 조금 걸으면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하나 있다.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일애각(天一涯閣)에서 따온 천일각은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것을 후대에 지었다고 한다. 넓은 하늘의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모퉁이만 허락된 유형의 땅을 암시하는 이름이지만 다산은 이곳에서 매일 광활한 세상과 마주했을 것이다.
다산초당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 다산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신분제의 한계는 뛰어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다산 정약용을 설명하는 모든 자료에 유학자 외에 등장하는 이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혜장스님과 초의선사등 스님들의 이름이 나오기는 하나 영화 '자산어보'에서 어쩌면 정약전의 스승이었을 장창대처럼 다산에게도 유학의 스승과 제자가 아닌 평범한 생활 속 스승과 제자가 있었을까?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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